<연극 변태 리뷰> 무균실 속 화성인 vs. 최강의 인간 |
2015-11-27 18:19:09 | 조회수 3009 |
※원문출처 : 관극시즌 (theatergoing_people)님 블로그(http://blog.naver.com/theatergoing_people/220535238860) - 본 포스팅은 '타임티켓 리포터' 활동의 일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한 뒤 작성한 리뷰입니다. - 리포터의 리뷰는 상업적인 목적으로 작성되지 않으며, 다양한 정보와 감상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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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타임티켓으로부터 관람권을 지원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극 중에서 아내는 시인을 ‘무균실 속의 화성인’에 비유해. 현실의 지구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야. 시와 책이라는 무균실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이런 시인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한 사람이 있어. 바로 최강의 인간, 돌쇠야. 동네 정육점 사장이지."
"시인은 돌쇠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경우 그릇된 우월감은 그런 방식으로 탄생하잖아."
"그런데 돌쇠가 등단해버린 이후로, 시인에게 자꾸만 연민이 가는 거야. 시인, 세상과는 한없이 뒤떨어진 사람, 최강의 인간 돌쇠와는 정 반대에 있는 사람, 무균실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화성인인 시인. 그런 그가 설 곳이 아예 없어져 버린 거지. 돌쇠가 그 무균실에까지 쳐들어 와 버린 거니까."
변태 장소: 대학로 연우소극장 기간: 2015.10.01 - 12.3 연출: 최원석 출연: 장용철, 김은석, 박호산, 김귀선, 전수환, 이종윤, 송예리, 조정민, 서지유 제작: 극단 인어
0. 책 1kg의 가격
E: 책 1kg이 얼마게?
S: 얼마인지를 따지기 전에, 책을 왜 kg 단위로 세?
E: 세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얼마일 것 같아?
S: 음…… 대충 권당 500g 정도로 가정하고 1kg이면 두 권, 권당 만원 정도라고 가정했을 때 2만원?
E: 100원.
S: 응?
E: 책 1kg에 100원이래.
S: 그건 웬 계산법이래? 특히나 요즘 책이 얼마나 비싼데. 웬만한 책은 만원은 훌쩍 넘어가잖아?
E: 책 대여점들이 망하고 나면, 업자들이 와서 책을 무게 단위로 재서 실어간대. 폐지로 취급하곤 화장지 같은 거 만드는 데 쓴다고. 그 때 책을 1kg에 100원으로 쳐서 사 간다네.
S: 기분이 이상한데. 그 책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든, 그런 거 상관 없이 그냥 종이로만 취급하는 거야?
E: 그런 셈이지.
S: 그런 건 어디에서 듣고 왔어?
E: 연극에서. 주인공 부부가 책 대여점을 운영하거든.
1. 연극 변태
E: 그림 같은 부부가 있어. 둘 모두 좋은 대학을 나와 좋은 교육을 받았어. 시를 읊고,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지. 남편은 시집을 몇 편이나 낸 시인이야. 하지만 그의 시집은 잘 팔리진 않아. 대신 그들은 도서 대여점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가.
S: 시를 쓰고, 책을 통해 돈을 벌고. 책에 파묻힌 삶이네. 멋지다.
E: 그렇지. 멋지긴 한데, 돈 벌이가 안 돼. 예전에 많던 책 대여점들, 이젠 거의 다 없어졌잖아? 이 부부가 운영하는 도서대여점 역시 장사가 안 돼. 월세와 운영비도 안 나올 만한 상황인걸. 부부는 생활고에 찌들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그 어떤 대책도 강구하지 못하지.
아내가 겨우겨우 일자리를 얻어다 주는 족족, 힘들다며, 몸이 아프다며 그만둬버려. 아내는 답답해해. 극 중에서 아내는 시인을 ‘무균실 속의 화성인’에 비유해. 현실의 지구에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사람이라는 거야. 시와 책이라는 무균실 안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지.
이런 시인과 완전히 대조를 이루는 한 사람이 있어. 바로 최강의 인간, 돌쇠야. 동네 정육점 사장이지.
S: 정육점 사장?
E: 응. 학창 시절 씨름을 했던 사람이야. 씨름을 할 때 당시 별명이 돌쇠였는데, 부부는 돌쇠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며 그를 돌쇠 아저씨라고 불러. 월 수입이 천 만원 이상씩 되고, 건너건너 아는 지인이 몇 백 명씩 되는 사람이야. 돈도 잘 벌고, 친구들을 만나면 맛있는 것들을 잔뜩 먹고 술을 진탕 마시러 다니는 사람이지.
S: 정말 대조적이다. 시인이 꿈의 끝에 있다면, 돌쇠는 현실의 끝에 있다고나 할까? 이들 사이에 접점이 있어?
E: 어. 돌쇠가 그 부부의 도서대여점에서 시를 배우거든.
<왼쪽부터 시인의 아내, 시인, 돌쇠>
S: 시를 배운다고?
E: 돌쇠는 속물적인 부분에선 누릴만큼 누려 본 사람이야. 여가 시간엔 술과, 미안, 여자를 끼고 흥청망청 놀던 사람이지. 그러던 어느 날 ‘이런 것들은 모두 너무나 얕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야. 그 때 부부의 도서대여점을 보게 된 거지. 술 냄새를 풍기며 여자 향수 냄새를 풍기고 있는 자신과는 너무도 대조적인 광경이 그 안에 있었던 거야.
딱 봐도 지적인 냄새가 풀풀 풍기는 두 부부가, 원두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고, 시를 읊고, 통기타를 치고 있었던 거지. 돌쇠는 그들을 흠모해. 언감생심 자신이 그 사이에 낄 수는 없다고 생각하지. 너무도 속물적인 자신과 달리 그들은 너무도 고귀해 보였거든.동등하게 어울리는 것은 바라지도 않고, 다만 그들에게 ‘배우는’ 학생의 위치로 그들에게 살짝 다가서. 돌쇠는 시인 부부의 삶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가가고 싶어했어. 그래서 열심히 시를 쓰는 방법을 배우지. 그 과정에서 수업비도 충분히 내고. 사실상 그 부부의 생활비 대부분은 돌쇠가 내는 수업비로 충당하고 있었거든.
그런 돌쇠에게 나쁜 의도는 조금도 없어. 그는 순수하게 그 부부를 존경해. 돌쇠는 대화 할 때 마다 스스로를 낮추고 부부를 높여줘. ‘저 같은 게 어떻게 감히……’ 라는 게 그의 말버릇이지.
S: 멋지다, 돌쇠. 그러기가 쉽지 않을 텐데. 아무래도 자신이 사회적으로 성공적인 위치에 있다 보니 시인 부부에 대해 깔보는 시선도 없진 않았을 텐데.
E: 반대로 생각해 볼까?
S: 반대로?
E: 응. 시인 부부는 돌쇠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그들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문화를 향유할 줄 알아. 비록 그들에겐 돈과 인맥이 없긴 하지만, 대신 그들에겐 높은 정신과 예술이 있어.그들을 선생님이라고 부르고, 자기 자신을 한 없이 낮춰가며 부부에게 시를 배우는 돌쇠가 그들 눈엔 어떻게 보였을까?
S: 부부가 돌쇠를 무시했단 얘기야?
E: 실제로 그 부부는 돌쇠를, 그리고 돌쇠가 쓴 시를 무시했어. 물론 대놓고 그러지야 않지. 그들은 돌쇠의 시에는 직접 현실에서 뒹굴어 본 진실된 경험에서 나오는 무언가가 있다며 돌쇠의 시를 칭찬해. 돌쇠는 양손을 내두르며 겸연쩍어하지.
하지만 그들 칭찬의 밑바닥엔, ‘당신과 같은, 지극히 속물적인 사람 치고는 잘 썼다’는 비웃음이 숨겨져 있어.
S: 우와, 나빴다. 진짜 나쁘다.
E: 맞아, 나빠. 나도 ‘와, 진짜 재수없다’고 생각하며 봤어. 그런데, 시인 부부와 돌쇠 사이의 양상이 조금 바뀌면서 시인 부부에게 연민이 가더라고.
S: 무슨 사건이라도 있었던 거야? 그 부부에게 더 심각한 경제적인 문제가 닥치나?
E: 차라리 그랬다면 좋았겠지. 그것보다 백 배쯤 더 심한 일이 일어나.
2. 베스트셀러 시인 동탁
E: 돌쇠는 출판을 하고 싶어 해. 그 부부가 바람을 넣은 탓이 커. “돌쇠 아저씨 시는 너무 좋아요, 출판 해 보세요!” 하고.
S: 그 칭찬 아닌 칭찬 역시 밑바닥엔 경멸을 품고 있었겠지?
E: 그런 셈이지.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돌쇠가 정말로 출판의 꿈을 꾸게 된 거야. 큰 꿈을 꾸는 건 아니야, 그냥 자기 이름이 박힌 시집이 있다면 주위에 선물하고 싶다, 정도의 바람이지. 게다가, 사실 자가 출판하는 건 어려운 일은 아니잖아?
S: 음음. 스스로 책 펴내는 거야, 뭐, 돈만 있으면 되지.
E: 그런데 시인이 굳이 바람을 넣어. 이왕 출판할 거라면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냐며, 평론가들의 인정을 받아 제대로 등단해야 한다면서 문단 및 출판사 사람들과 약속을 잡아. 그리고 돌쇠의 시를 그들에게 보여주게 되지. 사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돌쇠의 꿈을 깔아뭉개고 싶었던 것 뿐이야. 실컷 망신을 주고, ‘넌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니 나의 세계, 고귀한 예술의 세계에는 발 들일 생각도 하지 마라!’ 라고 말해 주고 싶었던 거지. 우회적인 방식으로.
그런데 돌쇠가 정말로 등단해 버린 거야. 돌쇠는 ‘시인’이 돼. 심지어 돌쇠의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고, 그는 유명한 시인으로서 방송까지 타게 돼.
S: 와우. 그 부부가 그렇게나 무시하던 돌쇠가 이젠 예술적으로도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선 거네. 아니, 오히려 더 성공해버렸네. 부부의 충격이 컸겠어?
E: 물론 부부는 엄청나게 큰 충격을 받아. 인생이 송두리째 뒤흔들리는 경험이지. 그리고 실제로 그들의 인생은 뒤흔들려.
그들은 평소 돌쇠를 무시해왔어. 그건 돌쇠에 대한 우월감에서 나온 감정이야. 이 우월감이라는 감정을 좀 볼까. 사실 객관적인 사회적 잣대로 봤을 때 그들은 돌쇠보다 나은 부분이 전혀 없어. 돌쇠는 그들보다 훨씬 더 우월한 경제적 능력과 인적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잖아. 월 수입이 천 만원이 넘어가는 돌쇠와, 그런 돌쇠에게 받은 수업료로 생계를 꾸리는 부부. 자본주의적 잣대로 봤을 때 그들 사이엔 어마어마한 갭이 있지.
S: 자본주의적 잣대로만 봤을 땐 그렇지. 하지만 문화와 예술이라는 또 다른 기준이 있잖아. 프랑스에선 ‘중산층’을 정의할 때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는가, 외국어를 할 줄 아느냐’ 하는 기준이 포함된다지? 그런 측면에서 보았을 때 사회적으로 더 상류에 가까운 것은 시인 부부인걸.
E: 그렇지. 그런데 자본주의적 기준에서 이미 그들과 비교할 수 없는 우위에 있었던 돌쇠가 문화적 기준에서조차 그들을 능가 해 버린 거지.
S: 아…….
E: 시인은 돌쇠에 대해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어. 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많은 경우 그릇된 우월감은 그런 방식으로 탄생하잖아. 시인은 욕망해. ‘나도 저렇게 살고 싶다, 나도 돈 많이 벌면서 맛있는 것 많이 먹으며 살고 싶다.’ 하지만 그의 현실 앞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지. 그런 시인은 돌쇠에 대한 열등감을, 우월감을 가지는 방식으로 해소해. ‘비록 내가 돈은 없지만, 나에게는 예술이 있다!’
S: 하지만 그것마저도 놓쳐 버린 거구나.
E: 시인은 평소 아내에게 “내가 베스트셀러 하나만 사면……!” 이라고 이야기하곤 했어. 돌쇠는 그와 동등한 자리에 와서 서게 된 것뿐 아니라 시인이 평소 희망하던 것까지 손쉽게 성취 해 버린 거지.
3. 돌쇠씨는 다 주는데, 나는 왜 다 빼앗기는 것 같지?
E: 초반에, 나는 시인 부부를 엄청나게 못마땅한 시선으로 보고 있었어. 특히, 시인이 쓰레기 치우는 일을 때려 치고 왔을 때 했던 말을 굉장히 비꼬아서 들었다?
S: 뭐라고 했는데?
E: 쓰레기 치우는 일이 쉽긴 하지만, 그 냄새를 맡다 보니 두통 때문에 견딜 수가 없다고. ‘잘나신 시인 나으리께서 언감생심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라니? 그래, 힘들겠지,’ 하고 팔짱 끼고 다리 꼬고 삐딱하게 쳐다봤거든. 안 팔리는 자신의 시집을 들여다보며 ‘내 시가 너무 어려운가?’ 하고 중얼거릴 땐 더더욱 싫었어.
S: 그래그래.
E: 그런데 돌쇠가 등단해버린 이후로, 시인에게 자꾸만 연민이 가는 거야. 시인, 세상과는 한없이 뒤떨어진 사람, 최강의 인간 돌쇠와는 정 반대에 있는 사람, 무균실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화성인인 시인. 그런 그가 설 곳이 아예 없어져 버린 거지. 돌쇠가 그 무균실에까지 쳐들어 와 버린 거니까.
그들에게는 곧 생활고까지 닥치게 돼. 도서대여점에서 나오는 수익으로는 도저히 월세도 처리할 수 없는 상황이라, 도서대여점을 정리하게 되지.
S: 거기에서 책 1kg에 100원 이야기가 나오는 거구나…….
E: 응. 네 말 대로 책 1kg 의 정상적인 가격은 2만원은 넘는 게 보통이지. 중고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큰 손해를 보고 파는 거야. 그런 상황에서 그들을 구해 준 게 누군지 알아?
S: ……돌쇠?
E: 응. 이사 준비를 하는 그들에게 찾아와서, 돌쇠는 시인 부부의 도서대여점이 있던 자리에서 북카페를 하겠다고 해. 그러면서 현재 도서대여점의 책을 제대로 된 가격으로 인수하겠다고 하지.
사실 시인 부부의 입장에선 엄청나게 고마운 제안이야. 헐값에 팔아 치워야 했던 책을 제값에 넘기게 되었으니까. 그런데 그들은 마냥 고마워할 수가 없었어.
S: 어떤 느낌인지…… 조금은 알겠어.
철저하게 그들 입장에서 본다면, 돌쇠가 그들에게 다가오기 전에, 그 도서대여점은 시인의 무균실이었어. 하지만 돌쇠가 그 무균실에 들어온 이후, 그들은 밀려났고 결국 그들의 자부심이었던 그 무균실마저도 돌쇠에게 점령당해 버리는 거구나. 이전에 시인은 그들이고 돌쇠는 고기를 써는 정육점 주인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밀려나고 그 자리의 시인은 돌쇠가 되어 버렸어.
E: 그들은 자조 섞인 목소리로, 혹은 원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해. “돌쇠씨는 다 주는데, 나는 왜 다 빼앗기는 것 같지?”
책에서 중요한 것은 종이가 아니야. 그 안에 담긴 내용이지. 그런데 그 안에 담긴 내용은 조금도 고려되지 않은 채, 단지 종이만으로 그 책의 가치를 따지게 된 순간 책은…… 아무 것도 아니야. 차라리 그들이 업자에게 종이더미로서의 책을 팔았다면, 그들은 그래도 괜찮았을지 몰라. 하지만 그들은 돌쇠에게 그 장소와 책을 모두 팔았지. 제 값으로. 책에 담긴 영혼과 정신 모두 팔아버린 느낌이었을 거야.
난 돌쇠가 싫지 않아. 돌쇠는 마지막까지 정말 순수한 마음으로 그들을 돕고 싶어 했거든. 속물적인 것, 물질적인 것을 벗어나 더욱 정신적인 세계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 역시 숭고한 것이고.
다만, 돌쇠와 별개로, 그들이 안타까웠어. 그냥 안쓰럽고 안타깝더라. 모든 것을 다 빼앗기고 밀려난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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